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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불명 연예소설 01편

관리자 2019.08.12 14:49 조회 수 : 5

 겨울은 시리다. 시리기 때문에 겨울은 아름답다. 따뜻한 사람의 마음이 입김으로 표출되고, 바깥보다 따스한 가슴으로 포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감상적인가? 먹고 살만해서인가?
      움츠린 채 코트 깃을 올리며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모두 얼어 있었다. 그들의 마음처럼, 검게 탄 손만을 내민 채 구걸하는 어느 거지의 모습은 겨울이 너무나 냉혹하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떨어지는 동전 소리가 몇 분마다 울리는 전차의 소리보다 덜 자주 들린다.

      학교는 방학을 맞아 한산했습니다. 몇 년 전 보다 도서관은 늙어 있었습니다. 때묻은 벽이 그러했고, 찢어진 책들 또한 그러했습니다. 대자보를 제치고 자격증을 알선하는 광고와 어학연수 문구로 허름해진 게시판도 늙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도서관을 찾은 졸업생들의 모습도 그러했습니다. 백원짜리 커피에 얼굴을 묻으며 앞날을 걱정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안쓰럽네요.

      나는 올해 4학년이 됩니다. 군대를 갔다왔으며 졸업하면 취직을 할 생각입니다. 전망 좋은 전자공학도이기에 취직 걱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얼마전 아임에프가 터졌습니다. 몇 해전에는 아임에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유식한 축에 속했지만 이젠 유치원 아이도 팔순 할머니도 아임에프가 뭔줄 압니다. 
      '뭔가 해야겠다.'
      막상 마음은 그렇게 먹었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여느 해처럼 도서관을 나가 전공책과 시름하고 또한 TOEIC책을 하나 사서 조금씩 영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간혹 이벤트 행사가 열리는 홍보책자를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긴 하지만 그냥 집에서 용돈을 받으며, 학교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기가 일수였지요. 도서관에는 친구들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고 또한 여학생도 있었습니다.

      나. 우리 집 삼형제 중 둘쨉니다. 우리 집에는 어머니 외에는 여자가 없습니다. 저 초등학교 이후로 여자들과 어울려 본적이 거의 없죠. 내 또래의 여자들은 어떻게 지내나 생각하면 물음표만 떠오를 뿐입니다. 우리과에 여자가 있기는 하지만 한 명뿐입니다. 멀리서 보면 남잔지 여잔지 분간도 되지 않는 여학생 꼴랑 하납니다. 그 친구를 통해서 여자에 대해 알려고 생각했던 나는 바보였습니다. 걔는 남자 엉덩이 치는게 취미고 남자들과 누가 술이 센지 내기하는 걸 좋아하며 당구가 200인 동학년의 후뱁니다. 으으... 싫다.
      그래서 난 여자들에 대해서 모르는게 너무 많아 여자란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어떻게하면 여자친구 하나 생길까, 고민도 해 봤지만 해답은 하나였죠. '나중에 인연이 있으면 생기겠지.' 남자들 세계에 있다보니까 점점 여자애들에게 침묵해져 갔습니다. 나는 여학생 앞에서는 말을 더듬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상대편 여자의 표정에 매우 심각하며 무슨 말을 할까 생각을 하고 말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늦고 뒷북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미팅 나가 성공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하기야 요즘은 미팅하자는 친구도 없습니다.

      도서관에 오면 좋지요. 근심을 허공에 뿌릴 수 있어 좋았고 나무들이 있었으며 지저귀는 새들처럼 재잘거리는 여학생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도서관에는 여학생이 많죠. 공대와는 달리 말입니다. 난 참 로맨틱한 사랑을 할 자신이 있는데 날 몰라주는군요. 어색함을 없애야 인연이 생길 것이다. 용기를 가져야 인연이 생길 것이다.

      "취직 걱정이나 해, 형."
      친구랑 햇살이 따스한 쓰레기통 근처에서 커피를 들고 건너편에 서있는 여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내 생각을 얘기하고 있는데 우리과 여학우 녀석이 내 엉덩이를 치고 갔습니다.
      "그래 난 너한테 형이야. 절대 오빠가 아니야."
      그렇게 소리쳐 주었습니다. 그녀는... 그녀라 말하기가 어색합니다. 하여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뻑큐 손가락을 쥐어 보이고 유유히 도서관 안으로 사라졌습니다.

      난 다분히 감성적입니다. 음반점에서 좋은 음악이 나오면 꼭 다 듣고 자리를 떴으며 간혹 꽃도 사곤합니다. 거지를 보면 항상 호주머니를 뒤지고 지하철 내 근처에 아가씨라도 섰을라면 머리칼의 향내를 맡고 그 아가씨의 아침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우리 아버지 얼마 전에 퇴직하셨습니다. 대기업 부장이셨는데 감원 소식이 들리자 이때다 하고 바로 사표를 내시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제대로 돈을 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형은 의산데 이제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서 레지던트 될 것이고 동생은 제대한지 얼마 안 되어 곧 복학을 할 것입니다. 우리 엄마는 아버지 시키는 데로 살림만 하시며 사셨지요. 좀 막막하긴 합니다. 그래도 벌어 논 돈이 있는지 생활에 바로 변화가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까지는 말입니다.

      학교 도서관을 해 질녘에 파하고 그인지 그년지 그 쪽 패거리들과 당구 한 게임 치고 길에서 뽕짝 메들리 다 듣고 누가 흘린 장미 한 송이 주워서 어떤 거지의 돈통에 넣어주고 몇 일을 안 감았는지 졸라 냄새나는 어떤 놈의 돼지 털같은 머리가 내 코를 찌르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저녁을 먹고 밤이 깊어 갈 즈음. 우리 세형제가 모두 집에 들어왔을 때, 아버지가 자기 아들들을 불렀습니다. 우리 세형제는 아버지 앞으로 가 앉았고 어머니는 과일을 깎으셨지요.
      "너네들 내가 백순걸 알 것이다."
      "네."
      "퇴직금을 조금 받았다만 내 생각해 둔 것이 있어 그대로 은행에 넣어 두었다. 그 동안 모은 돈으로 우리 다섯 식구가 살아야 하는데 니들 밑으로 들어가는 돈이 장난이 아니다."
      "네."
      "니들 세명 다 학비 대는게 힘에 부친다. 진이는 이제 돈을 벌테지만 그래도 녀석이 돈을 많이 까먹을 거야. 민이는 제대를 했으니 복학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원이는 이제 졸업반이구나."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니네 셋 중 한명은 쉬어라. 올해 대졸 취업난이 장난이 아닐거라는구나."
      끝말이 영 이상합니다. 아버지 형. 동생이 나만 쳐다봅니다. 엄마가 과일을 깎아 저한테만 주는군요. 
      분위기를 파악했습니다.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습니다.
      "왜 하필 접니까?"
      "반응이 참 늦구나. 미안하다. 너 밖에는 없구나. 쉬면서 공부도 하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간접적으로나마 사회를 경험해라. 우리 나라가 전자 분야쪽에 많이 투자한 만큼 문제도 많다. 구조조정이 심하게 들어갈 거야. 취직 못하고 백수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한 해 늦게 졸업해서 경기가 좀 풀리면 취직도 쉬울 거야."
      아, 막막하네요. 일년을 그냥 논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학비도 어렵다는데 학원 같은 델 보내 줄리가 없었지요. 외국이나 나갈까? 생각도 해 봅니다. 정신차려라 주원아.
      "그럼 일년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됩니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조건에서 그리고 나쁜 짓 하지 않는 조건도 붙겠지."
      "일년을 자유와 바꾸겠습니다. 제가 휴학을 하겠습니다."
      참 멋있게 말했는데 형과 아버지는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래 너야. 원이가 휴학하는 것으로 결정봤다. 민이는 복학 신청했느냐?"
      "곧 할거예요."
      동생이 안됐다며 나를 보고 실 웃었습니다. 엄마는 또 과일을 찍어 저한테만 줍니다.
      '하늘이시여!'

      휴학을 한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한동안 내 생활에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냥 도서관 갔다가 집으로 오곤 했지요. 마땅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네요. 자꾸 답답해집니다. 일 월이 다 갔을 때 난 휴학계를 냈습니다. 휴학계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환이라는 놈을 만났습니다.
      "어. 잘 살았냐. 정환이 네가 학교는 웬일이냐?"
      "나? 복학하려구."
      "좋겠다. 난 휴학하고 오는 길인데."
      "그래. 야 잘됐다."
이 녀석이 분위기 파악을 전혀 못하는군요. 뭐가 잘됐다라는 거지? 그가 복학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가사휴학 복학은 좀 까다롭군요.
      "너 뭐 할거냐?"
      "아직 모르겠다. 도서관 나와서 공부나 해야지 뭐."
      "너 나 대신 아르바이트 할 생각 없냐?"
      "너 대신? 뭔데? 안 그래도 아르바이트 자릴 찾는 중이었어."
      "너 면허증은 있지?"
      "응."
      "짱개 배달이야.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아. 할래?"
생각지 못한 아르바이트군요. 망설여집니다. 그거 힘들텐데... 하지만 친구의 유혹은 달콤했습니다.
      "월수 구십이야. 시간을 많이 뺏기긴 하지만 바쁜 건 식사때 뿐이지 점심때하고 저녁때. 밥도 주고 방도 주는데. 육개월만 하면 일년 등록금은 거뜬히 벌 수 있어. 싫어?"
      그 소리에 망설임은 사라졌습니다. 비록 낯선 경험이 될 것이라 막연함은 있었으나 바로 승낙을 했습니다. 철가방이라... 낯선 세계를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월수 구십만원이면 장난이 아니죠.

      다음 날 정환이를 따라 중국집으로 갔습니다. 그 곳은 어깨가 떡 벌어진 주인 아줌마와 짱골라 같은 주방장 아저씨, 보조 주방장 형, 일하는 아줌마 한 분, 그리고 철가방이 둘이 더 있었습니다. 정환이는 저에게 근방의 주소가 그려진 지도를 한 장 선물했습니다.
      빨간펜으로 동그라미 쳐진 곳은 단골집이라 했습니다. 일은 설이 끝난 이월 중순부터 하기로 했습니다. 며칠 정환이에게 물려받은 오토바이로 학교에서 연습을 했습니다. 쉽네요. 패달을 한 번씩 밟을 때마다 기어가 올라가는군요. 손잡이를 당기면 앞으로 가구요. 정환이에게 그의 일을 인계 받았습니다.

      설날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우리 형제 중 세뱃돈은 저만 받았어요. 차례상에 올려진 닭의 다리도 모두 제 차지였습니다. 이렇게 안해도 되는데, 아버지 어머니는 제가 안쓰러웠나 봅니다.
      부모님께는 그냥 아르바이트 자릴 구했다고만 했습니다. 뭐 왠만큼의 자유를 인정받았기에 그렇게 간섭을 하지 않았습니다.

      철가방 인생의 첫날은 그냥 중국집에 있었습니다. 배달을 나가지 않았어요. 홀에서 잔심부름만 했습니다. 두 녀석의 철가방과는 오늘 일이 끝나면 정식으로 상견례를 할 것입니다. 주인 아줌마가 생긴 것과는 달리 친절했습니다. 부드럽게 말하시는게 정이 많은 아줌마의 모습이었습니다.
      "강군아!"
      "네."
      중국집에서 전 강군으로 불려집니다.

      첫날은 홀에만 있었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쉽게 돈 버는 것은 하나도 없군요.
      여덟시에서 아홉시 사이에 일은 끝이 났습니다. 대부분 이 시간에 하루의 일을 정리한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배달 주문이 많았습니다. 짱개 같은 경우 하루 백그릇 이상이 배달되어진다고 합니다. 뜨아!
      중국집 건물 뒤편에 조그만 월세방이 하나 중국집 직원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을 지금 배달을 맡고 있는 두 녀석이 사용한답니다. 철가방 무시하면 안되겠군요. 다들 대학생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동윤이라는 놈은 명문대생이군요. 칠구라는 놈은 지방대생인데 상경한 놈이구요. 동윤이는 저와 동갑이었고 칠구는 저보다 세살이 어렸습니다. 동윤이는 철가방 시작한지 삼개월이 되었고 칠구는 한달이 조금 넘었다고 했습니다. 모두들 휴학중이었죠.
      동윤이는 과외도 병행하고 있었는데 자기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군요. 그 동안 자기가 모은 돈으로 주식에 투자했다고 했는데 쫄딱 망했답니다. 600포인트 일 때 샀는데 지금 삼백포인트대죠. 자기 아버지 마이너스 통장에서 500만원이나 몰래 뽑아 썼다고 했습니다. 집에서 자기 잡으려고 난리가 났다는군요. 그 돈 갚을 때까지는 집에 못 들어 간답니다. 칠구는 귀한 자식이라는군요. 누나만 둘이 있는데 집에서 자기를 떠받쳤다는군요. 집도 잘 산대요. 대전 녀석인데... 원래 공군으로 군입대하려 했답니다. 근데 술을 많이 먹었던 관계로 간이 나빠 신검에서 떨어졌다는군요. 다시 육군으로 입대를 해야 하는데 영장이 안나왔답니다. 짱개 배달을 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이랬습니다. 자기 아버지 차가 그렌져 3000이래요. 그걸 아버지 몰래 몰고 나갔다가 전봇대 때려 박고 200만원짜리 에어백 양쪽으로 터뜨려 먹고 차를 완전히 망가뜨렸대요. 그래도 자기는 안 다쳐 효도했다면서 떳떳하게 집에 들어갔는데 졸라 욕들어 먹었다는군요. 태어나서 그렇게 야단맞은 적은 처음이래나요.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가출했답니다.

      삼일째 되던 날부터 가까운 곳은 제가 배달을 나갔습니다. 한 달이 지나면서 계속 범위를 넓혀나간 나는 짱개집을 중심으로 제 구역을 확보했습니다. 북쪽은 동윤이 구역이었고 남서쪽은 칠구의 영역이었으며 남동쪽이 제 구역이었습니다. 각각 특징이 있죠. 칠구의 영역엔 아파트가 많았고 동윤이 구역엔 상가가 많았습니다. 만화방과 주유소 심지어 여관까지 동윤이 구역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구역은 그냥 일반 집들이 대부분이고 학원 몇 개와 멀리가면 울 학교의 하숙집들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학교 연구실에서도 간혹 배달 주문이 있었습니다. 학교 앞에 짱개집이 몇 갠데 여기에다 시켜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철가방이라 무시도 많이 당했지만 하다보니 할 만 하군요. 헬멧을 안 쓰고도 태연하게 빽차 앞을 지나쳐도가구요. 학교로 배달을 나갈 때면 수위아저씨가 웃어주더군요. 무시 당한 일을 회상하자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조카 같은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철가방이라 놀렸구요. 빨간등을 켜놓고 노란 옷을 즐겨 입는 예쁜 아가씨들의 집에 배달갔는데 철가방이라 쌀쌀맞게 대할 때는 서러웠어요. 고등학생들한테도 꼬리치는 것들이. 그릇에 담배다 가래다 뱉어 놓은 사람들은 각성해야 되요. 시킨거 그대로 들고 온적도 많았습니다. 늦게라도 간 날이면 엄청 열받게 하는 놈들도 많았습니다. 피자 스쿠터가 나를 앞질러 가기라도 하면 엄청 열도 받지요. 재밌는 일도 많았어요. 어떤 아줌마가 잠옷차림으로 날 유혹도 했구요. 그릇 찾으러 갔다가 짱개하고 짬뽕 때문에 싸움난 부부도 말려 봤어요. 부부 싸움때 짱개 그릇은 던지지 맙시다. 한번은 시켜 먹은 중국집 그릇으로 살림 장만한 자취생도 보았구요. 물론 다 뺏어 왔지만. 짱개 시킨 놈이 삐져 가버렸다면서 같이 먹자고 한 아저씨도 있었습니다. 난 호모가 싫어요. 짱개 배달갔다가 사진 찍힐 뻔도 했어요. 무슨 하우스 였나봐요. 배달나갔는데 번쩍번쩍 백차들이 서있었고 기자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여러 명이 잡혀 나오더군요. 돈은 형사한테 받았어요. 이제는 능숙해지고 있습니다.

      전 일을 마치면 집으로 귀가를 했습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동윤이랑 칠구가 기거하는 방에서 자고 갑니다. 칠구는 집에다 전화를 자주 했어요. 몸값 협상을 하더군요. 자기 돌아가면 얼마 줄거냐고 자주 물어보더이다. 영장이 언제 나오는지도 계속 물어 보았습니다. 동윤이는 집에다 전화를 하지는 않았어요. 일주일에 이틀은 과외를 하기 때문에 보통 날보다 일찍 일을 마치고 어딘가 갔지만 방에 있을때면 자기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하더군요. 완전히 잡혀 살고 있었습니다. 동윤이 녀석은 이상한 잡지 모으는 취미가 있었습니다. 가슴이 예쁜 모델들이 야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이 많은 그런 잡지 말입니다. 이 방에 동윤이가 모은 잡지가 굴러다니고 있습니다. 방의 전화는 중국집 세 개의 전화번호 중 한 번호를 공유하고 있지요. 새벽에 배달주문 올 때가 간혹 있습니다. "우리 중국집은 저녁 8시 이후에는 배달을 하지 않습니다. 10쉐이야."
      이런 전화를 자다가 받으면 다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전 어쩌다 하루를 자는데도 이런 전화를 받는데 얘들은 상당히 많이 받겠네요.

      한달 한달 그렇게 갔습니다. 4개월이 후딱 지나갔지요. 날씨는 더워지고 있습니다. 제 통장에는 300만원 넘게 저금되어 있습니다. 저 부잡니다. 석달 정도 더하면 일년 등록금을 모으고도 백여만원이 남겠습니다. 2학기때는 그냥 공부하며 놀 계획을 잡고 있습니다. 여자친구라도 생기면 좋겠네요. 그런데 가망이 없겠습니다. 누가 철가방을 쳐다나 봅니까.

      오늘도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애마가 된 오또바이는 햇빛에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저 오또바이에 철가방을 세개나 싣고 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베테랑이 되었단 증거죠.
      "강군아 미술 짱개 하나다."
      아줌마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여기서 오또바이로 오분쯤 되는 거리에 미술학원이 하나 있습니다. 아줌마같은 노처녀가 하나 있는데 단골이 되었습니다. 엘레베이터도 없는 오층 건물의 사층에 위치하고 있는 그 미술학원의 원장이었습니다. 거의 주문은 짱개 하나였습니다. 별로 달갑지 않은 단골이지요. 사층까지 걸어 올라가면 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완전히 체력단련하고 있지요. 내 다리에 알통이 보기좋게 생겼습니다. 주문은 점심 주문이 뜸해지고 쉴 만해지는 세시경에 있었습니다. 항상 그 시간이에요. 밉습니다.
      "잘 갔다 와라."
      중국집 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던 동윤이가 비웃으며 마중을 해주는군요.

      헐레벌떡 학원으로 철가방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어 배달의 총각! 거기 놓아주세요."
      미술 학원의 현관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앞에 원장실이 있었습니다. 책상이 하나 있고 세개의 소파를 거느리고 있는 테이블이 있었으며 저기 한쪽에 먼지가 앉은 컴퓨터가 하나 있습니다.
      다시 그릇 가져오기가 번거로웠습니다. 오늘은 아예 미술학원 밖 계단에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짱개 하나 먹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어요. 배달주문도 뜸한 시간입니다. 계단 난간에 기대어 담배를 피며 원장아줌마가 짱개 다 먹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박. 또박."
      듣기 좋은 구두의 발자국 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옵니다. 팔 짤린 원피스가 참 잘 어울리는, 아직 타지 않은 하얀 피부가 너무나 고운, 그리고 딸기같은 입술을 머금고 천사같은 예쁜 얼굴을 소유한 아가씨가 그 좋은 구두의 발자국 소리를 내며 올라오고 있습니다. 내 손에 쥐어진 담배는 재 털어 주지 않는 것을 시위하듯 머금고 있던 재를 떨구어 버렸습니다.
      "저. 좀 비켜주시겠어요?"
      목소리까지 예쁘군요. 그녀를 보고 섰습니다. 그녀를 보며 웃어 주었지요. 그런데 그녀가 날 지나치지 않고 내 눈을 멀뚱멀뚱 쳐다봅니다. 왜 안가고 섰을까? 사층일까? 아니면 오층 주인집 딸일까?
      "좀 치워 주시라니까요."
      "예?"
      그녀는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켰습니다. 오늘처럼 철가방이 어색하게 보였던 적이 있을까? 이런, 제가 내 발 앞에 놓아둔 철가방이 계단을 떡 막고 있었습니다. 철가방을 힘껏 들어 머리위로 올렸습니다. 천사같은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해주고 갑니다.
      '참 이쁘다.'
      그녀는 미술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참 동안 학원문을 보며 있었는데도 원장 아줌마가 짱개 그릇을 밖으로 내다 놓지 않았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학원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요. 현관문을 열려고 손잡이까지 잡았지만 문득 아까 들어간 아가씨 생각이 났습니다. 들어갈 용기가 서지 않네요.
      '조그만 더 기다리자.'
      또 십분이 흘렀습니다. 현관 앞에서 철가방을 옆에 두고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날씨가 더운게 잠이 실 오네요. 졸았습니다.

      "그래 내일봐."
      현관문이 열렸고 원장아줌마가 날 내려보고 섰습니다. 아까 아가씨도 그 옆에서 날 쳐다봅니다.
      "배달의 총각이 여기 있었네. 어머 내가 그릇을 안 내놓았구나. 다림아. 내일 두시 정도에 와."
"알았어요. 그럼 저 갈게요."
      원장 아줌마는 아까 그 아가씨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 아가씨는 이제 계단을 내려갑니다. 아까 처럼 좋은 구두 발자국 소리를 내며 말입니다.
      "여깃어."
      원장아줌마가 그녀가 한 층을 다 내려 갔을 때쯤 그릇을 들고 나왔습니다. 재빨리 받아 철가방에 넣고는 달려 내려갔습니다. 이층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그녀의 뒤에 섰지요. 그녀는 천천한 걸음이었습니다. 계단이 무서운 듯 앞을 보지 않고 밑을 보며 내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랐지요. 이제 한층만 더 내려가면 되는데 이 아가씨가 섰습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더니 한쪽으로 비켜섭니다. 그녀의 올려 세운 눈동자가 뇌쇄적입니다. 그걸 보고 있노라니 발을 뗄 수가 없군요.
      몇 초간 그렇게 서 그녀를 보았습니다. 그녀가 이상한 표정을 짓는군요.
      "먼저 내려가세요."
      그녀가 뒤따라가며 자신의 뒷모습을 보는 재미를 빼앗아 버리네요. 먼저 가라니 가야겠지요. 이 놈의 철가방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녀를 지나쳤습니다.
      "아얏!"
      결국은 철가방이 사고를 쳤군요. 철가방의 한 꼭지점이 그녀의 허리를 찔렀습니다.
      "괜찮으세요?"
      "네 괜찮으니까 가세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내가 철가방 신세여서 그런지 참 매정하게 들렸습니다. 그냥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아픈 곳을 보며 내가 손을 내밀자 뱉은 그녀의 말은 다소 차가웠습니다. 그냥 그녀의 말대로 뛰어 계단을 마저 내려왔습니다. 오또바이의 시동을 거는데 저기 그 아가씨가 더운 햇살을 한 손으로 가리고 걸어갑니다.
      "빠라바라 빠라밤."
      그녀를 지나치며 괜히 경적을 한 번 울렸습니다.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입니다. 참 이쁜 여자지만 그냥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가, 있었는지도 모르게 잊혀지는 그런 여느 아가씨들이라고만 생각을 했습니다. 단지 조금 다르다면 이름을 안다는 것. '다림이라. 다리미? 세탁소 하나?'

      짱개 집에 가니 주인 아줌마가 왜이리 늦었냐고 야단을 칩니다. 눈을 구슬처럼 굴렸습니다. 입은 열지도 못했구요. 그래도 기분은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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